STORY 커리어 & 전환 도전

비전공자가 CTO 역할을 맡았을 때 벌어진 일

전략 기획자로 들어간 스타트업에서 기술 조직 전체를 책임지기까지, 사투와 생존의 기록

Vailyn
Vailyn 2026.04.06
화이트보드에 정리된 계획과 구조를 분석하며 업무를 주도하는 여성, 비전공자에서 기술 조직을 이끄는 역할로 확장된 상황을 보여주는 장면

1. 인생의 항로를 바꾼 예기치 못한 폭풍

모든 시작은 계획대로 흐르지 않았습니다. 제가 처음 이 스타트업에 합류했을 때, 제 명함에 새겨진 직함은 CTO가 아닌 '전략/기획 총괄 전무이사'였습니다. 수년간 글로벌 전략 컨설팅펌에서 기업의 난제들을 풀며 쌓아온 '문제 해결 능력'을 발휘해 보자는 제안을 받았고, 저 역시 기술보다는 비즈니스의 큰 그림을 그리고 조직의 체질을 개선하는 역할에 집중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의 저는 기술이란 비즈니스라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수많은 수단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스타트업의 현실은 이론보다 훨씬 가혹하고 역동적이었습니다. 프로젝트가 한창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무렵, 기술 조직의 수장이었던 CTO가 돌연 사퇴를 선언했습니다. 배는 이미 거친 바다 한가운데 떠 있었고, 엔진실 곳곳에서는 제어할 수 없는 불꽃이 튀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당장 뜨거운 엔진실로 뛰어 들어가야만 했고, 결국 그 무거운 이름표가 저에게 주어졌습니다. 기획 총괄로서 디자인팀을 관리하던 범위를 넘어 프론트엔드, 백엔드, 심지어 AI팀까지 아우르는 기술 조직 전체를 책임져야 하는 '비전공자 CTO'의 고독한 항해가 시작된 순간이었습니다.

2. 안개 속의 전장: 경험 없는 군대와 침몰하는 배

엔진실 내부의 상황은 밖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처참했습니다. 당시 우리 개발팀과 디자인팀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이번이 생애 첫 직장인 '사회 초년생'들이었습니다. 열정은 누구보다 뜨거웠지만, 실무에서 마주하는 복잡한 기술적 부채와 체계적인 협업 프로세스를 경험해본 적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가이드라인 없이 각자의 방식대로 달려온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단순한 버그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서비스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기술 설계 단계부터 치명적인 결함들이 얽혀 있었습니다. 기능 하나를 추가하면 열 개의 버그가 터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었고, 서버는 수시로 비명을 지르며 멈춰 섰습니다. 외부 투자자들의 시선은 냉담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개발자도 아닌 사람이 기술 수장을 맡는다고?"라는 불신 섞인 의심이 피부를 찔렀습니다. 회의실 테이블에 마주 앉은 그들의 눈빛에는 '과연 이 배가 항구에 도착할 수 있을까'라는 냉소적인 질문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저를 믿지 않았고, 저는 오직 결과로만 저 자신을 입증해야 하는 벼랑 끝에 서 있었습니다.

3. 전략가의 무기: 코드가 아닌 '로직'으로 시스템을 해부하다

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코딩 책을 펼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저는 제가 가장 잘하는 방식인 '문제의 본질을 분해하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컨설팅펌 시절, 엉망으로 얽힌 대기업의 과제들을 구조화하며 단련했던 그 사고의 근육이 기술 현장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개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기능이 왜 안 되는가?"가 아니라, "현재 아키텍처에서 데이터가 흐르는 경로가 비즈니스 로직과 어떻게 충돌하고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기술적 언어를 비즈니스 언어로 번역하고, 다시 비즈니스의 요구사항을 기술적 우선순위로 재배치했습니다. 설계상의 결함을 하나씩 논리적으로 짚어내며, 단순히 '고치는' 수준이 아니라 '다시 세우는' 개선안을 도출했습니다.

투자자들과의 대면 현장에서 저는 더 이상 수세에 몰리지 않았습니다.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모호한 답변 대신, 현재 시스템의 한계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단계적 로드맵을 수치와 로직으로 제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투자자들의 눈빛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제가 코드를 얼마나 유려하게 짜는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대신 '어떤 기술적 난관 앞에서도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아내고 비즈니스를 지속시킨다'는 리더로서의 집요함에 신뢰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신임은 화려한 기술 스택이 아니라,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하는 로직에서 나온다는 것을 뼈아프게 배운 순간이었습니다.

4. 고독한 밤샘과 독학: 책임이라는 이름의 가장 무거운 짐

투자자들의 신뢰를 얻었지만, 현장의 공백은 여전히 제 몫이었습니다. 낮에는 전략가로서 팀을 독려하고 투자자를 상대했지만, 밤이 되면 저는 다시 초라한 학생으로 돌아갔습니다. 모든 직원이 퇴근하고 적막만이 감도는 텅 빈 사무실, 홀로 남은 저는 모니터 빛에 의지해 코드를 뜯어보고 디자인 툴을 공부했습니다.

사회 초년생인 우리 팀원들에게 정확한 방향을 제시하고 요구사항을 전달하려면, 제가 그들의 언어를 완벽히 이해해야만 했습니다. 프론트엔드의 렌더링 원리부터 백엔드의 데이터베이스 인덱싱, 그리고 우리 서비스의 핵심인 AI 모델의 학습 프로세스까지...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이 이어졌지만 포기라는 단어는 떠올릴 수도 없었습니다.

"내가 모르면 우리 팀원들이 길을 잃고, 나를 믿어준 투자자들의 자산은 공중분해 될 것"이라는 공포가 저를 채찍질했습니다. 도움이 필요할 때는 체면을 버리고 외부 전문가들에게 머리를 숙이며 정확하게 요구했습니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체하는 것이야말로 스타트업 리더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범죄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빡빡한 사투 속에서 저는 의도치 않게 창업의 모든 과정을 간접적으로,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치열하게 겪어내고 있었습니다.

5. 직접 코드를 만지며 마주한 기술의 실체

어느덧 회사 사정으로 인해 인력의 부침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함께 밤을 지새우던 팀원들 중 일부가 떠나야 했고, 남겨진 코드는 주인 없이 표류했습니다. 수정해야 할 사항은 산더미인데 처리할 손길이 부족해지자, 결국 저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직접 코드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오타를 고치거나 간단한 문구를 수정하고 UI의 정렬을 맞추는 수준의 작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줄 한 줄 코드를 직접 고치고 배포하며 저는 묘한 전율을 느꼈습니다. 전략이 수만 피트 상공에서 벌어지는 공중전이라면, 코드는 진흙탕 속에서 벌어지는 백병전이었습니다. 내가 내린 결정이 즉각적으로 화면에 반영되고 시스템에 영향을 미치는 경험은, 수백 페이지의 컨설팅 보고서가 실행되는 것을 지켜볼 때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성취감을 선사했습니다.

비전공자로서 가졌던 기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걷히고, 기술 역시 결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논리적 도구'일 뿐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쌓아온 문제 해결 능력이 코드라는 실체적인 언어를 만났을 때, 저는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하이브리드 빌더(Hybrid Builder)'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6. 사투가 남긴 진짜 자산: 현실적 창업가로의 재탄생

돌이켜보면 그 지독했던 사투의 시간들은 저를 완전히 다른 존재로 재창조했습니다. 예전의 저는 화려한 차트와 숫자 뒤에 숨은 '꿈꾸는 전략가'였다면, 그 시간을 겪은 후의 저는 현장의 먼지를 뒤집어쓴 '현실적인 생존가'가 되었습니다.

서비스 하나가 온전히 돌아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보이지 않는 땀방울과 밤샘이 필요한지, 기술적 설계의 사소한 실수가 비즈니스 전체에 얼마나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리더의 꺾이지 않는 고집'이 침몰하던 조직을 어떻게 다시 일으켜 세우는지를 온몸으로 체득했습니다. 비전공자로서 CTO라는 과분한 자리를 감당해야 했던 그 경험은 저에게 단순히 개발 지식을 준 것이 아닙니다. 불확실성이라는 안개 속에서도 "어떻게든 길을 찾아내겠다"는 대담함과, 복잡한 문제를 가장 단순한 본질로 분해하는 통찰력을 남겼습니다.

7. 홀로서기를 가능하게 한 가장 단단한 밑거름

지금 저는 1인 개발자이자 솔로 파운더(Solo Founder)로 독립했습니다. 이제는 밤을 새워 함께 고생하던 팀원들도, 매서운 눈으로 결과를 독촉하던 투자자들도 제 곁에 없습니다. 하지만 텅 빈 모니터 앞에 앉아 복잡한 로직을 짤 때마다, 혹은 예상치 못한 서버 오류로 가슴이 철렁할 때마다, 저는 그때의 그 텅 빈 사무실과 차가운 새벽 공기를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책임감 하나로 버텨내며 기술의 벽을 한 칸씩 넘어섰던 그 기억은 제가 1인 개발이라는 고독하고 긴 항해를 지속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입니다. 1인 개발자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세련된 코딩 기술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문제를 해결해내겠다는 전략적 의지와 포기하지 않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겪은 의도치 않은 창업 수업은 지금 제가 만드는 모든 서비스의 뼈대가 되었습니다.

8. 한계와 무력감 앞에 서 있는 당신에게

혹시 당신도 자신이 준비되지 않았다고 느끼는 자리에 서서 밤잠을 설치고 있나요? 저처럼 비전공자라는 꼬리표가, 혹은 경험 부족이라는 현실이 당신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나요? 부디 기억하십시오. 문제 해결의 본질은 도구(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고(전략)에 있습니다.

당신이 과거에 쌓아온 그 어떤 경험도 결코 쓸모없는 것은 없습니다. 저의 컨설팅 경험이 엉망진창인 서버 설계를 바로잡는 열쇠가 되었듯, 당신만이 가진 독특한 관점이 기술의 한계를 돌파할 결정적인 단서가 될 것입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지금 겪고 있는 그 고통스러운 사투의 시간만이 당신을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창조자로 만들어줄 것입니다. 저의 이 서툰 기록이 누군가의 불완전한 항해에 작은 위로와 이정표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 글이 갑작스러운 책임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 당신에게, 혹은 한계에 부딪힌 1인 개발자에게 작은 용기가 되었다면 응원의 마음을 전해 주세요.
보내주시는 따뜻한 지지는 비전공자에서 전략가형 개발자로 거듭나는 이 여정에 커다란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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